[한국인권신문=광주·전남·충청 취재본부 이길주 기자]
광주지검 김진희 검사의 사무실에는 아직 5월 달력이 걸려 있다. 달력의 5일은 스터디카페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여고생 이채원양이 숨진 날이다.
김 검사는 사건의 실체를 모두 밝혀낼 때까지 달력을 넘기지 않겠다고 했다. 이유조차 알지 못한 채 생을 빼앗긴 피해자에게 수사기관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경찰이 단순 살인 사건으로 송치했던 이 사건은 검찰의 추가 수사를 거치면서 성폭력 범죄를 목적으로 한 살인 사건으로 성격이 달라졌다. 광주지검 형사3부는 11차례에 걸친 보완수사를 진행한 뒤 장윤기를 ‘강간 등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장윤기는 지난 13일 열린 두 번째 공판에서 성폭행을 목적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했다는 취지의 진술을 처음 내놨다.
“자살하려 길동무가 필요했다”…검사는 믿지 않았다
장윤기는 수사 초기 “자살하고 싶어 함께 죽을 사람을 찾았다”는 취지로 범행 동기를 설명했다. 그러나 김 검사는 그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족과 지인 가운데 장윤기가 평소 극단적 선택을 언급했다고 진술한 사람은 없었고, 실제 시도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발견하기 전부터 흉기를 들고 여성을 찾아다닌 정황과 15분가량 이양의 뒤를 따라간 모습도 우발적 범행이라는 주장과 맞지 않았다.
장윤기는 처음에는 피해자가 남성인지 여성인지조차 몰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폐쇄회로(CC)TV 영상과 이동 경로를 토대로 추궁이 이어지자 혼자 걷는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골랐다는 취지로 진술을 바꿨다.
김 검사가 주목한 것은 피의자의 말 자체보다 말이 바뀌는 방향이었다. 장윤기는 수사기관이 어떤 증거를 확보했는지 가늠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설명을 내놓았고, 진술 사이에는 쉽게 메우기 어려운 모순이 반복됐다.
특히 범행의 성적 동기를 의심하는 질문이 이어지자 장윤기는 “수사가 성적인 방향으로 흘러갈까 봐 그랬다”는 취지로 답했다. 김 검사는 그 말이 오히려 피의자가 가장 감추려 했던 범행 목적을 드러낸 대목이라고 판단했다.
희미한 흰색 물체가 바꾼 사건의 방향
직접적인 단서는 흐릿한 블랙박스 영상에서 나왔다.
범행 현장 인근에 주차돼 있던 화물차 영상에는 장윤기가 자신의 차량 쪽으로 이동할 때 희미한 흰색 물체가 나타났다가 범행 후 사라지는 장면이 담겼다.
경찰 수사 단계에서는 판독하기 어렵다고 분류됐지만 검찰은 영상을 반복해서 분석했다.
김 검사는 흰색 물체가 장윤기 차량의 조수석 뒷문일 가능성에 주목했다. 피해자를 차량에 태우기 위해 문을 미리 열어뒀다가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자 범행 후 문을 닫았다는 가설이었다.
영상에는 장윤기가 범행 직후 운전석으로 곧장 가지 않고 조수석 방향으로 몇 걸음 이동했다가 되돌아오는 모습도 담겼다. 차량 뒷문 한가운데에서 발견된 혈흔과 동선을 맞춰보면, 피 묻은 손으로 열린 문을 밀어 닫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장윤기가 피해자의 목을 졸라 이동시키려 했던 수법도 성범죄 목적을 뒷받침하는 정황으로 제시됐다. 검찰은 장윤기가 과거 다른 여성을 상대로 범행했을 때도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파악했다.
수사팀은 장윤기의 주거지와 휴대전화 등에서도 성범죄 가능성을 보여주는 여러 자료를 확보했다. 훼손된 성인용 인형과 여성의 신체를 불법 촬영한 사진, 성적 행위를 묘사한 메모와 지인들의 진술 등이었다.
하나만 놓고 보면 결정적 증거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자료들이었다. 그러나 범행 전후의 행동과 차량 상태, 영상 속 동선이 하나씩 연결되면서 사건의 윤곽은 달라졌다.
피 묻은 차량은 왜 가족에게 돌아갔나
수사는 장윤기의 범행을 넘어 경찰의 초기 대응으로도 확대됐다.
검찰이 장윤기의 주거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건물주는 “피의자의 아버지가 이미 짐을 치워갔다”고 설명했다. 장윤기의 아버지가 성인용 인형을 대형 쓰레기봉투에 넣어 가져가는 모습도 건물 CCTV에 남아 있었다.
장윤기의 아버지는 현직 경찰관이었다. 검찰은 본가를 압수수색하고 가족들의 휴대전화를 확보했다.
휴대전화 포렌식 과정에서는 경찰 수사 관계자가 차량 내비게이션과 블랙박스 확인 일정 등 수사 상황을 전달한 정황이 발견됐다. 경찰이 혈흔이 남아 있던 차량을 사건 다음 날 가족에게 돌려주고도 관련 내용을 수사 기록에 충분히 남기지 않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장윤기의 차량에서는 범행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케이블타이도 발견됐다. 그러나 초기 경찰 수사 기록에는 케이블타이 관련 내용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피의자 조사에서도 관련 질문이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특별수사단은 장윤기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관의 고의적 부실 수사 여부와 지휘선 개입 가능성 등을 조사하고 있다. 다만 관련 의혹은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으로, 구체적인 책임 범위는 확정되지 않았다.
김 검사는 이번 사건이 검찰과 경찰의 조직 간 대립으로 비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대부분의 경찰과 검사가 현장에서 맡은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며, 경찰 기록을 검토할 때도 은폐를 전제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빠진 부분을 보완한다는 생각으로 수사했다고 설명했다.
“기록만 보고 기소하면 법정에서 진실을 놓칠 수 있다”
장윤기 사건은 검찰의 보완수사권 존폐 논쟁과도 맞물렸다.
김 검사는 경찰이 보낸 기록만으로 기소 여부를 판단할 경우 범죄의 실체뿐 아니라 피고인에게 유리한 사정까지 놓칠 수 있다고 말했다. 추가 확인 없이 불완전한 상태로 기소하면 법정에서 무죄가 선고될 가능성이 커지고, 결국 재판부가 사실상 수사까지 떠안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과 아동, 장애인처럼 스스로 피해 사실을 설명하거나 적극적으로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운 사람일수록 수사기관의 추가 확인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윤기 사건이 경찰 송치 단계의 단순 살인 혐의로 마무리됐다면 차량에서 발견된 케이블타이와 훼손된 성인용 인형, 블랙박스 속 흰색 물체의 의미도 드러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김 검사의 설명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이 보완수사권을 둘러싼 정치적 공방의 사례로만 소비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논쟁의 중심에는 제도가 아니라 피해자와 유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40초의 고통…작은 증거도 남김없이 찾고 싶었다”
김 검사가 수사팀에 반복해서 강조한 것은 작은 증거 하나도 놓치지 말자는 말이었다.
이양이 범행을 당한 시간은 약 140초였다. 김 검사는 짧은 시간 동안 피해자가 겪었을 공포와 고통을 생각하며 가능한 모든 수사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피해자의 가족은 딸을 잃은 데 이어 경찰의 수사 축소·은폐 의혹까지 접해야 했다. 수사기관을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상과 생업도 무너졌다고 김 검사는 전했다.
장윤기가 당시 이양을 범행 대상으로 삼지 못했다면 다른 누군가가 피해자가 됐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한 개인에게 닥친 불운이 아니라 사회가 막았어야 할 범죄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검사는 장윤기에게 법이 허용하는 가장 무거운 형이 선고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최종 형량은 재판부가 증거와 법리에 따라 결정할 사안이지만, 같은 범죄가 반복되지 않도록 사건의 모든 실체가 법정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했다.
사무실 벽에 걸린 5월 달력은 아직 넘어가지 않았다.
김 검사는 이 사건이 수사기관의 권한을 둘러싼 논쟁보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빼앗겼는지를 기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채원이가 마지막 피해자가 돼야 합니다. 이 사건을 가해자의 변명이 아니라 피해자의 눈으로 바라봐 주셨으면 합니다.”
이길주 기자 liebwhj@naver.com <저작권자 ⓒ 한국인권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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