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청호 칼럼] 근세 이성계와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역사가 현대사에 주는 함의(6)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14/07/13 [17:58]

 

 
[한국인권신문=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장 황청호]
 
유럽 르네상스 문화의 산실 메디치 가문
 
이탈리아의 상업도시 피렌체! 인구 30여만 명에 불과한 이 도시만큼 세계적인 예술의 집합소이자 우아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곳도 드물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형성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바로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메디치(Medici family)가문 때문일 것이다. 출신도 보잘것없는 한 가문이 이탈리아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으로, 더 나아가 세계적인 가문으로 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그 영향력이 상업과 정치라는 현세적인 분야뿐 아니라 종교적인 분야,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안목을 바탕으로 한,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을 통해 급기야는 르네상스시대에까지 강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메디치 가문의 존재로 인해 피렌체 또한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고, 또한 그로 인해 수백 년 후의 오늘날에 살아가는 시민들에게까지 조상들의 후광에 힘입어 세계적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여 경제적인 보상을 얻어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과거의 피렌체, 현재의 피렌체,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 미래의 피렌체에도 예술적 부유함을 안겨 줄 이 가문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메디치 가문(이탈리아어:Medici)은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썩 훌륭한 집안 출신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들의 족보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르세우스가 조상이라고 하는데, 이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 가문 출신 외에 없다. 토스카나 지방에서 농사를 짓던 선조 몇몇이 아무래도 성공하기 위해서는 농사보다는 그 시대에 막 발전하기 시작한 상업에 종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하에 가까운 상업도시 피렌체로 향한 것이, 이 가문의 성공신화의 출발점이 된다. 이 메디치 가문은 세 명의 교황(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 레오 11세)과 르네상스예술의 후원자로 잘 알려진 피렌체의 통치자 로렌초와 같은 유명한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그리고 나중에는 혼인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왕실의 일원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메디치 가문은 다른 귀족 가문들처럼 그들도 자기네 도시 정부를 피렌체에 건설하여 지배하였으며, 또한 피렌체를 예술과 인문주의가 융성한 환경의 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그들은 밀라노의 비스콘티와 스포르차, 페라라의 에스테, 만토바의 곤차가 등 다른 위대한 귀족 가문들과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내는 큰 역할을 한다.
 
 
메디치(Medici family)가문의 유래와 성장
 
이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농업 지방인 무겔로에 왔다고 하며, 처음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1230년대 문헌에서였다. 비록 메디치(Medici)가 이탈리아어로 “의사”를 뜻하는 말이지만, 메디치의 정확한 명칭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다. 14세기 초, 메디치가의 일족들은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과 더불어 모직물 교역의 걸출한 집단으로 자라난다. 이탈리아 도시정부 시설에서 일부 메디치 사람들이 참석했음에도, 아직 알비치나 스트로치와 같은 저명한 가문들보다 중요성이 떨어졌다.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라는 사람은 치옴피의 난 동안 모직물 제작자 조합의 의장직을 맡았으며, 1396년 안토니오라는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1400년에 메디치 일가는 또 다른 음모와 연루되어 두 명만 제외하고 20년 동안 피렌체의 정치에서 추방되었다. 이 둘 중의 한 사람인 아베라르도(비치) 데 메디치는 나중에 메디치 왕조 시대를 연 장본인이다.
 
아베라르도의 아들 조반니 디 비치는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여 가문의 재산을 늘렸으며,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비록 얼마간의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지만, 그는 가문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조반니 디 비치 이후 메디치가의 계통은 둘로 나뉜다. 조반니 디 비치의 장자 국부 코시모(Cosimo de' Medici 'Pater Patriae') 계통과 조반니 디 비치의 차남인 대 로렌초(Lorenzo di Cosimo de'Medici)의 계통이다.
 
1434년 조반니 디 비치의 장남인 코시모 데 메디치가 그란 마에스트로의 자리를 인계받았으며, 피렌체 공화국의 비공식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가문의 장자 계통 -(국부 코시모의 계통)- 은 1537년 피렌체의 초대 공작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의 암살 때까지 군림하였다. 수 세기 동안의 긴 통치는 겨우 민란으로 국외추방을 당한 두 번(1494년~1512년 사이, 1527년~1530년)만 중단되었다. 권력은 차남 계통-(대 로렌초의 계통)- 에게 넘어갔는데, 그의 증손자이며 초대 토스카나 대공인 코시모 1세와 함께 시작되었다. 메디치 가문의 권력 상승은 연대기 베네데토 데이(Benedetto Dei)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코시모와 그의 아버지는 은행업과 제조업에 기반을 둔 가문의 재산으로 예술과 문화, 교회를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세대에 걸친 출세 기반을 확실하게 잡았다. 아무튼, 피렌체 시민들의 절반은 메디치 가문의 경영 지점에 고용되어 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메디치 가문의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
 
메디치 은행은 유럽을 통틀어서 가장 부유하고 훌륭한 은행이었다. 그 덕분에 한동안 메디치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유복한 가문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를 토대로 메디치가는 피렌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였으며, 나중에는 이탈리아 전역과 유럽에까지 확대되었다. 회계전문직에서의 그들은 신용과 차변을 추적하기 위한 복식부기체제의 개선이라는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이 체제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하는 회계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메데치 가문은 르네상스 전성기의 피렌체를 이끈 로렌초 데 메디치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에게는 도시를 이끌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죽은 후에 “일 마그니피코(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그는 시를 쓰기도 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남긴 시 한 편이다.
 
Whoever wants to be happy, let him be so:
about tomorrow there’s no knowing.
행복해지고자 하는 자들이여, 행복을 즐겨라
내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
 
또한, 그는 자기 아이들에게 엄청난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었다. 로렌초는 자신의 성공적인 도시경영을 계속 이어가게 하고자 아이들의 능력을 파악하고 그들의 미래와 직업을 설계하였다. 1478년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는 부활절에 교회에서 암살당했다. 로렌초는 나중에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는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 데 메디치(1478-1535)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였다. 로렌초가 죽자 능력 없는 그의 아들 피에로 2세가 피렌체의 통치권을 물려받았는데, 피에로는 1494년에서 1512년동안 메디치가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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