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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사람들 사이의 섬, 그 시선을 넘어
 
한국인권신문 기사입력  2019/10/04 [11:42]


 

 

[한국인권신문= 연극평론가 이강렬]

연극이 연극으로서 존재하기 이전의 상태를 꿈꿀 때, 그것은 맨몸의 육체로서 자신의 존재와 문제를 지워나가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 성소수자(性少數者)의 문제를 정면으로 드러낸 음악극 <13 후르츠케이크(Fruitcakes)>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난 6월 뉴욕 초연 당시 ‘뉴욕타임즈’지에 의해 성소수자들 행사인 월드프라이드(WorldPride) 기간에 꼭 봐야 할 공연으로 선정된 작품이기도 하다. 성소수자는 동성애자뿐만 아니라 여성애자, 남성애자, 양성애자와 젠더퀴어, 트랜스젠더, 간성, 제3의 성(性) 등을 포괄하여 일컫는다.

 

최근 안병구 연출에 이지혜 작곡으로 ‘백암아트홀’에서 다시 공연된 이 작품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성소수자 문제를 극복해온 역사적 인물들의 아픔과 경험을 통해 사회적인 차별과 편견에 고통 받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연극은 각 인물의 에피소드가 사실을 기반으로 슬라이드와 함께 옴니버스 식으로 보여주어 극적 흥미를 더해준다. 신라 혜공왕을 비롯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 한스 안데르센 등 인류의 발전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위인이자 성소수자인 13명이 경험한 어두운 시간을 시각적 예술성과 희화화된 캐릭터로 만들어져 상징적으로 연기된다.

 

나는 이러한 연극을 통해 공연예술가들의 숨은 욕망을 읽는다. 그들은 결국 관객과 맨몸으로 마주하며 편견 없이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기를, 그 안에서 새로운 보편적 자기로 인식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자신의 요구에 뼈를 세우고 살을 만들어 온몸으로 표현한다. 그러한 손짓으로 관객을 설득의 공간으로 동참시키며 상호교감을 통해 인권과 존엄성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 시대 공연예술가들이 자신의 존재를 존재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으면서까지 풀어야할 난제로 삼고 있는 화두는 이 변화된 시대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다양한 성(性) 정체성 문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을 개인의 단일한 정체성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라는 질문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고정화된 불편한 과거 흔적까지 만난다. 그 과정에서 전망을 알 수 없는 미래, 그로 인해 흔들리는 성소수자라는 불안한 현재가 점차 정리되고 안정도 찾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는 이러한 과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껴안은 연장선상에서 비로써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정연한 논리나 인식의 틀을 벗어나 말로써 설명되기 어려운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꿈꾼다. 그것은 바로 연극의 육체성의 회복에 대한 기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하여 그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온 것은 서구의 오랜 형이상학적 전통이자 이원론적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 방식은 현대에 이르러 그 근원적인 정당성에 대한 많은 회의와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물질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이 사물화 되는 현시점에서 인간의 정신이 너무나도 무력함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물과 인공지능이 지배하게 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시대에는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적인 관점은 오히려 소멸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마저 품게 된다. 어쩌면 인간의 정신이 점차 무기력해짐에 따라 사물과 인간지능이 도래하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비로소 육체의 미숙함을 정면으로 되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그동안 전통적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어 오랫동안 왜곡당해 왔던 영역이지만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최후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육체란 정신과 분리된 단순히 애욕적인 측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정신성과 육체성은 하나의 교접함의 영역으로서 공존한다. 즉 연극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존재 이전의 상태로서 육체성의 회복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작금의 연극은 단순히 어떤 하나의 인식의 틀로서는 정의될 수 없는 현대라는 인식의 텅 빈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희미한 옛 기억을 찾아 모든 문명의 껍질을 다 벗은 맨몸의 육체로서, 빈 존재로서 자신의 행보를 내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연극읽기 역시 새로운 독법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요구이다. 물론 연극은 말이라는 제한영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육체언어를 표현할 수 있다. 실제로 요즘 들어 많은 작품들이 음악과 조명, 몸짓 등의 또 다른 무대언어를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적절하게 표현한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개념이나 의미로도 포착될 수 없는 곳을 꿈꾼다.

 

이 작품 역시 보이지 않는 곳을 보려하는 것이며 말할 수 없고, 애써 외면하던 문제를 말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대사는 적절한 표현수단이 되지 못한다. 다만 온몸으로 느끼며 그러한 자신의 요구를 음악과 육체라는 매개를 통해 표현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관객들로 하여금 이러한 느낌을 공유할 수 있도록 스토리를 만들어 연극 속으로 이끌고자 노력한다. 그래야만 관객은 이해하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에 비춰 사회적 편견과 모순에 공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덧붙여 일상의 공간을 원하는 메시지로 환원해줄 수 있는 대안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연출자가 자기를 부정하거나 관객하게 강요하지 않을 때, 그리고 그러한 침묵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사유의 여백을 관객에게 안겨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혐오와 반감, 무관심, 침묵 등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을 넘어 남들과는 다르다는 기쁨, 다양성에 대한 설득이 가능하다. 나아가 사회 곳곳에 삶의 존엄함을 인식한 활기로 가득 차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다소 깊고 무거운 소재지만 개성 넘치는 연출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역설적 무대미학으로 표출해내는 연출가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참신한 무대였다.

 

이강렬/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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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04 [11:42]  최종편집: ⓒ 한국인권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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