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률 칼럼]강준만칼럼을 읽었다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20/07/22 [13:11]

 

 

[한국인권신문=박병률]

 

그는 90년대 후반 이시대 비판과 토론문화를 불러일으킨 의미있는 인물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그가 불러일으킨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의한 나비효과를 진심 믿는다. 일명 ‘김대중죽이기’라는 번득이는 주제로 조중동이라는 센세이션을 불러냈다. 아직도 조중동은 그 이름 못지않게 이슈의 한가운데서 의미심장하게 회자되고 있다.
그는 소위 아웃사이더에 속한다. 소위 이류정도라고나 할까. 고교든 대학이든 명문에서 벗어나있다는 점을 커밍아웃 하면서 우리시대 명문병을 들춰냈다. 이유는 단 한가지, 명문에 속하지 않은자가 명문을 대하는 것에 대한 자기검열이었다. 명백하거니와 필시 명문에 대한 선망이나 시기심에서 도발적인 구상을 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예상한 것이다.
가령 서울대 폐지론은 서울대 출신이 해야만 설득력이 있는 것 아니겠나?라는 자기검열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외치는 설움과 허무같은 것을 꺼냈던 것인데, 다른 분야에서도 그 위력은 대단하다는 것을 그는 역설한다.
가령 부자나 부동산 부자가 부동산세 강화를 외치면 설득력이 크다는 것이 상식 아니겠나? 기득권자가 기득권을 내려놓는다면 파급효과가 크다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물론 그 벽도 두텁다(대개는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난다.)그렇지만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당위성이 작금의 정부의 자구책이고 미래세대를 이야기할수 있는 실천항목이기도 하다.
기존의 방향대로라면 암울해진다.
정책을 빠져나가듯이 투기가 일상화되고 시장의 논리대로 놔둔다면 강교수의 말대로 “뼈빠지게 내집마련하고자 노력하려고 저축해도 소용없고, 전세월세가 높이 뛰어 살던 곳에서 쫒겨나 이리저리 헤메는 삶”이 된다.
이것을 두고 그는 <합법적 약탈>이라고 명명했다.
심지어 이 합법적 약탈의 대열에 진.보수를 가리지 않는 대입시키는 소위 양비론까지 접목시키는 비약을 감행할 정도로 흑역사에 대한 소회를 감추지 않을 정도이니 그 욕망의 대열에서 비켜갈 자가 누구이겠는가.
아니면 너무도 진보적인,, 너무도 공동체적인,, 자들은 그 파고가 얼마나 험난한지 생을 극단적으로 마감하고야 마는 극한의 저항을 피해갈 길이 없다. 단 하나의 집은커녕 빛을 내어 정치 사회에 뛰어든 사람이나, 너무도 진보적이고 순진무구하게 단순화 시켜 버티려다 초가삼간은 물론이고 가족과 자신의 삶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극단적 선택도 감행하는 것도 볼 정도이니 그 파고는 실로 매섭고 저항이 극렬하다.
이는 진보 보수를 망라한 게임이자 전투로 소개할 만큼(강준만교수도 예외아니다) 대개는 단기적 실패와 장기적 난제로 남겨져 후대로 이어져 왔다. 그렇다고 토론과 소통조차 마다할 소냐며 지면에 써주는 것이라도 지극 감사할 뿐이라 여겨본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부동산 신화는 마치 경마장의 기수와 말 그리고 배팅하는 관객처럼 비유해본다.
또 이것은 마치 월드컵과 프로리그의 축구경기와 선수, 관객의 참여와 들뜬 상황처럼 그려보면 보다 확실해진다.
축구에 관심없는 자들은 월드컵이 자국에서 열려도 도통 관심없겠지만 대개는 결과나 과정에 귀추를 주목하며 흥미를 보인다는 것이 보통의 경우다. 선수의 화려한 등극과 연봉협상에 놀라고 내가 응원한 팀과 스타성 선수에 대한 팬심, 승리와 패배에서 아쉬워하고 자축하는 가운데 내가 투자한 부동산에 대한 부푼 희망과 기대감, 내집앞 내 땅과 관련한 개발호재 등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 등이 경기장의 그것과 유사해서 이미 가진자나 선수나 무산자나 구경꾼이나 거의 한통속에 포함되어 경기를 중단하거나 열지 않거나 룰을 자꾸 바꾸면 심한 저항을 받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포기해야 할까. 아니면 보다 근본적인 처방을 통해 선진시스템과 거시적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까.
여전히 정권의 방향에 따라 진-보수를 달리해가며 정책의 전환과 시행을 보았다.
부동산이 경기장과 경마장의 그것과 유사하다보니 유산자나 무산자의 기득권내지 꿈이 되고말았다는 것은 현실론이다.
이상론으로써는 가장 쉽게 개인이나 기업의 치부수단이 되다보니 다른 그 어떤 분야보다 단기차익에 유리한 부동산신화에 대해 블랙홀처럼 자금이 유입되고 기업과 금융 가계와 금융이 안전한 부동산에 대한 커넥션을 이뤄 상호부조를 통해 국부가 대단히 왜곡되어 버린다는 점을 주목한 것이다.
진보수를 망라하고 부동산대책은 이뤄졌지만 이것이 미봉책이나 근본적이냐의 차이만 존재했고, 이 정책을 시행하는 측의 기득권적 지위로 인한 허술한 정책만 존재했다는 것이 강준만교수의 관점이고 현실이다.
권력차원의 지방분권은 지방자치로 어느정도 긴 시간동안 이뤄져 왔다.
이제는국부차원의 지방분산이 부동산이라는 차원으로 이어진다면 아무리 느려도 의미있는 진일보가 된다. 극렬한 저항을 보아도 명약관화하다.
전방위 저항이 국민개개인의 성향과 맞물려 이어진다면 제아무리 공동체적 정책을 시행하려해도 물거품이 될 것이다. 국민의 지지를 먹고사는 포퓰리즘시대에 포풀리즘정권의 한계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있는자는 지키려들고 없는자는 일확천금의 꿈을 로또복권방의 열기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보다 거시적인 정책이라고 한다면 대략, 명문대학의 탈 서울정책, 행정수도 이전, 지방일자리 증대, 지방학군 육성 등의 느리지만 의미있는 행보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지지율과 거시정책간의 딜레마문제가 남아있는 가운데 대선후보 등의 인기성 발언과 근본적 정책을 구분해야 하는 것은 냉철한 감시와 선별의 시각을 지닌 유권자의 몫이 된다.
강준만교수의 끊임없는 비판적 시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 소중한 지식인의 감성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며 그이 컬럼을 복기해본다.

 

박병률 higheal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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