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률 칼럼] 조국에게 조국은 무엇인가?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19/08/26 [09:10]

 

 

 

[한국인권신문=박병률]

조국교수 문제가 최대현안으로 부각되는 시점에서 다시 <국가란 무엇인가>를 떠올려보게 된다. 왕정을 지나 근대성을 배경으로 개인은 시민이라는 계층을 기반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매우 고급스런 형태를 배태 시켰다. 국가는 현대적 시민이 왕정을 종식시킨 후 재화의 소유권과 정부를 조직할 수 있는 조직이다. 부국강병이 그 어떤 가치보다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덕목이 된다. 그것 없는 이상은 개인적 신념이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

 

개인으로써의 조국, 아버지로서의 조국, 교수로서, 정치·관료로써의 조국, 시민으로서의 조국이 있다.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나 각각 다른 위치에 서있는 개인이 있다.

다양화 사회로 진화 되어갈수록 더욱 더 많은 페르조나를 가진 개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조국교수 문제가 최대 현안이 되고 있다. 억울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할 것이다. 하늘 아래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그만큼 개인은 다양한 페르조나로 다양한 상황에 처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조국 하나만 뚝 떨어진 별종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우선 개인적으로 조국교수가 잘 극복하고 일어서기를 바란다.

조국교수를 특별히 편들거나 반대로 떨어뜨리려는 의도는 없다. 그럴 자격이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시민이라는 틀에서조차 비판적 의식을 방기해서는 안된다. 시민이 만들고 조각한 가치 속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등 고등한 제도가 있기에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국가는 좀더 세련되고 잘 정비된 형태로 진화되어야 한다.

 

조국교수를 두고 맹목적인 신봉은 반대다. 그렇다고 극단적인 신상털기도 반대한다.

조국이라는 가치를 두고 비판과 옹호가 혼재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국가와 사회를 이룩한 시민적 집단차원에서 조차 현미경식 검증은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병원에서 악성세균이나 전염병을 바라보는 식으로 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조국사태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많다. 어찌나 다양하게 접근하던지 온 나라가 아크로 폴리스 토론장이 되었다.

 

대입선발제도와 투자, 재산권과 경영권 상속과 부채전이문제, 재외출생 자녀의 국적, 개인의 자유와 권리·자율성의 한계,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정의론, 국민청문회 등. 토론 백화점이 되었다.

다른 나라가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고, 어떤 나라가 보면 부럽기도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부러운건 마찬가지다. 훤칠한 인물에 남다른 배경, 학벌은 또 어떤까. 이런 조국을 두고 국민과 국론이 나뉘었다. 최적임자론과 그 반대, 중간론과 비판적 지지와 비판적 반대...

 

이분법적 잣대를 대기엔 소위 국가적 차원의 일이다. 믿음이나 신앙 등 개인적 차원의 이상이 아니다. 조국교수는 공인과 사인을 아우르며 사는 시민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사안이기도 하다. 얼핏 입 따로 몸 따로 사는 이중 분열적 삶을 살아온 듯 보일 수도 있다. 이렇듯 개인으로서의 조국이 있다. 자식을 키우며 입시걱정이나 하는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대문을 넘어 걸어나오면 사회적 가치가 있다. 방금전 밥상머리서 하면 꼰데나 하는 잔소리로 들을지나 궁금하다. 그것도 소위 주머니를 두둑히 채워주면서 하는 것과 아닌 것은 천지차이다. 세상은 이렇듯 근본적인 차이로 채워진 곳이다.

 

조국은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운석이 아니다. 늘 있어왔고 불리어 왔던 존재이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한 아버지로 남편으로 가문의 일원으로 아들로 교수로 시민으로 국민으로 세계인으로써의 존재이다. 누가 과연 조국에게 법무장관으로서의 조국으로만 살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런이가 있다면 아마도 그는 모든 현실에 담쌓고 하나의 페르조나에만 집착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조국은 스스로도 주장하는 바와 같이 억울함도 주장하고 반성도 하면서 말로다 하지 못하는 중간지대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는 사실과 진실이 공존하기에 팩트만 갖고서야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내면이라면 더욱 미증유가 된다.   그런 의미로 철저히 소명해야만 한다. 국민적 청문회든 국회청문회든 아니면 둘 다 모두해서든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라도 소명하고 해명한다면 도리어 의혹이 해소되지 않을까. 설사 증폭 된다 해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역사는 전개되어 이젠 강을 건너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결론이다. 국가는 무엇인가. 개인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국민이라는 집단이 굳이 필요 없을 것이다. 국방 외교 경제 복지 등 국가의 국민이 되어 상생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에 국가는 명실상부 이름에 부응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 결함이나 과거에 필요이상의 믿음과 환상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빈데를 잡기위해 초가삼간을 태워는 격이다.

 

국가는 부국강병을 근간으로 삼는 집단이다. 가난하게 살아도 소위 깨끗하면 그만이라는 믿음은 매우 위험하다. 깨끗한 사회는 좋은 사회지만, 깨끗만 하면 지위도 얻고 명망도 얻게 된다는 믿음이 팽배한 사회는 정말 아니다. 그야말로 복지부동한 사회나 정글법칙만이 난무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정치적 진영논리로 국론이 양분되어서는 안된다. 정치적 구호에 부화뇌동 선동되어서도 안된다. 다시금 시민이 창안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자각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마치 자유와 권리만으로 본다거나, 자본주의를 마치 돈으로만 환산하는 것은 오류다. 책임의식을 갖고 소유하는 돈은 자본이라는 지위를 획득하고, 책임의식이 없이 소유하는 자본은 돈이라는 오명을 획득한다.

 

조국교수가 소유하고 갖고 놀던 돈은 사회환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자본>이 되었다. 조국교수 일가가 사회에 투척한 학교는 일제치하 심산 김창숙선생의 <성균관대학>이 되고, 우당 이회영선생의 <신흥무관학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개인으로써의 조국은 일개 범인으로써 하등 다를 바 없는 일상속의 군상이었더라도, 공인으로써나 시민으로써의 조국은 역사적 책임과 발군의 능력을 바탕으로 국가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더한 층 격상시켜야 할 것이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이나 심산 김창숙도 지난 과거에 대한 깊은 성찰과 참회를 바탕으로 더욱 빛날 수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며, 검찰개혁과 <新 일본 경제보복조치> 등에 직면한 오늘의 대한민국을 앞에두고 조국교수는 평소 주장하던 철학을 실천으로 답해야 한다. 그것만이 비판적 시민을 설득하는 첩경이며 함께 완수하는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다. 잘 넘어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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