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길청 칼럼] 1930-1940년대 생에 대한 소고

한국인권신문 | 입력 : 2021/10/28 [10:12]

 

[한국인권신문= 엄길청] 

 

한국이 현대사에서 겪은 격동의 시대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연 1960년대와 1970년대 이다. 혹자는 1980년대를 거론하기도 하겠지만, 당시는 군인들이 쿠테타만 하지 않았으면 정말 모든 게 안정되는 시기여서, 지금 생각하면 12년간의 그들이 차압한 시절은 몇몇 정치군인들이 우리 현대사에 엄청난 생채기를 낸 비운의 시기였다.

 

요즘 논란이 되는 당시의 군부정치인들의 경제정책 선정(beneficent government)의 평가 적절성을 놓고 굳이 한번 돌아보자면, 사실 그 당시는 그들이 강제집권하고 얼마 뒤에 세계가 유례없는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고엔화)의 ‘3저 경기’라는 경이로운 글로벌 호황이 닥쳐와서 요즘 중국이 성장하듯이 여러모로 준비된 우리나라가 국민내공으로 좋은 성과를 낸 시기여서 당시 국가리더십의 역량으로 보긴 무리가 있다.

 

오히려 군부 정치인들이 서둘러 한계기업 정리라는 명목으로 2차 오일쇼크 후유증에 힘들어하던 국제그룹, 조선공사그룹, 라이프그룹 등 주요 수출산업과 기간산업 그룹을 강제로 밀실 해체한 것은 중대한 독직(misprision)이며, 이 사건은 곧 이어 닥친 3저 경기를 우리 기업들이 충분히 다 살리지 못하게 한 명백한 과오이다. 당시 대우그룹도 많이 휘둘리다 그 때는 넘겼지만, 결국은 그 후 시름시름 사라졌다.

 

신군부가 주변에 해체그룹을 멋대로 넘겨준 인수자인 한일그룹, 극동그룹과 한진그룹 조선부문 등은 지금 그나마 인수자들도 파산하고 없다. 경영할 여력도 없는 중견기업들에게 초대형 그룹을 해체하여 나누어 주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짓들인가.

 

당시 1980년 초반의 불안했던 국내 물가관리를 강제로 다룬 치적을 놓고 경제선정으로 평가한다면, 그건 이미 우리 물가의 핵심 근원요소인 국제유가와 국제금리가 1982년 하반기를 고비로 진정되고 있음을 간과한 말이다. 특히 국제유가는 그 후 두 사람의 군부출신 대통령(1930년대생)이 담당한 1989년까지 장기적으로 하락했다.

 

그런데 이런 호황기를 인생의 절정에서 만나 한국 경제성장의 과실을 고스란히 향유한 세대가 바로 같은 1930-1940년대 세대 중에 아주 소수가 있다. 물론 이 세대는 1940년생 기준으로 대학출신이 10%남짓이고, 국졸과 무학이 50%가 넘는 심각한 동년배 간의 학력격차를 지니고 있어 대다수 1930-1940년대 세대는 평생을 죽으라고 고생만 했고 지금도 고생스런 노후를 보낼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시기에 아주 소수이지만 사업을 했거나 권력을 가졌거나 고위직에 있거나 지식전문가로 일한 사람들 중에서 누린 지나친 경제적 호사와 기회적 특권이익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서울은 1970년에 고급으로 한강맨션 32평을 건립했다, 이곳은 지금 30억 원이 넘는 시세를 보인다. 1973년에는 반포 주공아파트 32평이 지어졌다. 이곳은 구형 32평이라서 재건축 지분으로 요즘 50억 원이 넘는다. 토지지분이 많은 탓이지만 듣는 이가 기가 탁 막힌다. 1976년에는 잠실주공 5단지 35평이 지어졌다, 요즘 호가는 30억 원 남짓이다. 다시 눈을 돌려 대치동으로 가보자. 1983년에 대치동 미도아파트 30평이 지어졌는데 지금 시세는 32억 원 정도이다. 같은 1983년에 지은 대치동 선경아파트, 우성아파트는 30평이 지금 32억 원 정도이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한양아파트는 시세가 더 높아 소개를 약한다. 특히 우후죽순처럼 지어진 1980년대의 강남지역 고층아파트 건립을 두고 정치군인들은 전시에 대전차 방어능력 강화로 남하저지력 증강이라는 소가 웃을 이유를 대서 실소를 자아냈다.

 

그런데 강남아파트가 대거 입주될 1970-1980년대 당시 주력 구입자들이 나이 40대 중년들인 바로 1930년대와 1940년대 생들로 나라와 사회의 주축들이었다. 이는 당시 생애 주택구입에서 가장 큰 집을 사는 시기를 40대 중반, 마지막 집을 사는 시기를 50대 초반으로 나온 조사에 근거한 것이다. 또 자녀들이 고등학교, 대학교에 진학하는 시기여서 학군이 좋다는 강남(강북의 명문고를 대거 이전시켰다)의 진입유혹이 큰 세대들이다.

 

이들 중에서 공기업이나 은행 등 직장에 사내 대출제도가 있고, 시중은행 융자제도를 좀 알고, 사업으로 모아둔 돈이나 친지에게 빌릴 곳이 있고, 주변의 인맥이 좋아 부동산정보가 흘러온 사람들이 당시로선 제법 큰돈(웃돈 지르기가 있었다)을 내고 청약을 하고 입주를 했다. 그러는 동안 건설당국은 서울의 강북지역 전역이나 한강 이남의 영등포 일원, 서부지역, 동부지역 등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특히 명문학교를 쏙 빼내어간 강북 동네는 모두 방치상태였다.

 

당국에서는 이후에 태어난 1950년대생 이후 세대에게는 서울서 20킬로나 떨어진 농촌마을 분당, 일산과 위성도시의 평촌, 중동, 산본 등지에 살집을 지어주어 지금도 이 세대 사람들은 그 지역에 많이 산다. 건축연한으로 보면 이 외곽지역들이 훨씬 새롭고 단지조성이나 주변조경도 좋은 편인데, 집값은 선배들이 먼저 들어간 강남과는 하늘과 땅이다. 결국 10-20년 먼저 태어난 선배들이 좋은 장소를 먼저 독점한 것이다.

 

다는 아니지만 1930-1940년대생으로 당시에 사업가이거나, 좋은 직업을 가졌거나, 집안이 사는 게 좀 나은 사람들은 이런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어느 새 어언 40-50년이 흐른 지금, 막대한 불로소득이나 천문학적인 장소이권이 그들의 가족에게 넘어가기도 한다. 누구는 3대째 증여란 소리도 나온다.

 

이건 아니라고 본다. 단 한 번의 입주 챤스로 눌러앉아서 어떻게 후배들이 땀 흘려 노동과 수출로 벌어들인 돈을 가만히 앉아서 다 자기들 땅 프리미엄으로 빨아들이는가. 지금 그 동네 아파트만이 왜 평당 1억 원인지는 필자가 도시자산학자로서 납득이 안 되며, 언젠가는 반드시 국민토론에서 민주적으로 그 합리성과 타당성을 붙여 보아야 한다고 본다. 아마도 곧 MZ세대들이 나라 정치를 맡으면 꼭 그러리라 믿는다. 아니 그래야 한다.

 

당시 1930-40년대 세대들은 정부 요직에서 도로나 다리나 지하철도 모두 그 지역을 사통팔달로 먼저 만들어가면서 결과적으로 자기들 입주지역의 가치를 높였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978년에 도로명이 만들어진 남부순환로, 1986년에 도로명이 제정된 양재대로, 1979년에 준공한 성수대교, 반포대교 등이 대표적이다. 성수대교는 서둘러 세웠다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1976년 도로가 명명된 테헤란로와 1978년 준공된 남산 3호 터널과 1980년대 후반에 올림픽이란 이름으로 강남에서 공항으로 직진하는 한강변 올림픽대로의 건설은 강남부동산 가치편중 정책의 가히 압권이다.

 

앞선 세대에 지식인재가 없던 시절, 소년 출세하여 각 분야에서 나이 30-40대에 고위직에 오른 그 세대 지도층들은 이렇게 서울 돈을 가로세로로 떡 주무르듯 했다. 기업에서는 이 세대들이 30대에 대기업 임원에 올라 평생을 기사, 접대비, 골프, 비서, 집무실을 혼자 쓰는 호사도 누렸다. 아마 건강한 분들은 지금도 골프장에서 그들끼리 노후를 보낼 터이다.

 

물론 대다수의 1930년대 생과 1940년대생의 인생은 정말 고단했고, 나라에 충성하고, 가족에게 헌신한 세대들이지만, 아주 소수의 그 세대 사람 중의 강남지역 부동산 소유자나 입주자들은 정말 한 나라에서 다른 세대 국민들에게 이래도 됐었나 싶을 정도로 시대의 찰나적 특혜가 컸었고, 그 배후는 다분히 당시 동년배 지도층들의 미필적 집단적 고의성이 짙어 그 흑 역사의 따져봄이 필히 있어야만 이 분함이 풀린다.

 

우리는 민주국가이고 자유국가이고 시장경제 나라여서 누구나 잘 사는 게 잘못이 아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다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모두가 본 받을 만큼 정당하고 국민 모두가 흔쾌히 두고두고 인정해 주어야 하고, 또 후대들도 생각하며 자기 돈을 적당히 챙겨야 그게 참다운 나라이고 그게 진정한 부자가족들이다.

 

과거사 청산은 국가관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 간, 세대 간, 지역 간에도 있을 수 있다, 국가는 한 시대에서 특정지역 부동산을 우월적 상황에서 선점을 하고, 대대로 후배들이 애써 만든 건강한 소득과 부로 지금도 어쩌다 강남으로 이사하려면 높은 입장료를 바쳐야하는 작금의 세태에 대해 전 국민에게, 특히 평생을 긴 출퇴근길에 시달리는 1950-60-70년대 후배세대에게 한번쯤은 사과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걸 다시 회수하자는 게 아니다. 너무도 확연한 부의 구조적이고 의도적인 편중개발이라는 시대적사건을 후대가 잘 알고 미래에는 다신 그러지 말자는 것이다. 동네를 그렇게 삽시간에 마구 잘 만들면 어디라고 비싸지지 않겠는가. 분당, 일산은 지금도 시내로 오가는 출퇴근길이 머나 먼 실크로드이다.

 

이런 시대적 과오의 일정한 책임이 연관된 기간의 당시 대통령이 긴 병고 끝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쿠테타 동료들과 국민들에게 진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빚을 유언으로나마 깊은 용서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재임 시에 많은 집을 지은 그이기도 하지만, 그의 동료들과의 정치그늘에서 강남땅을 거의 다 요리한 뒤에 먼 산 넘어 멀리에다 후배 시민들을 내보낸 일과, 이젠 연례행사인 강남집값 랠리의 연원이 된 강남인프라 과잉지원 집중에 대해 역시 유감은 표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지금 천문학적인 개발이익의 정치적 논쟁이 뜨겁게 일고 있는 문제의 지역도 바로 이 때 지어진 강남지역으로부터 2009년에 새로운 고속도로가 남쪽으로 개통하자마자 개발업자들이 들어붙어 일어난 어느 한적한 산골마을 대장동 고속도로IC 근처에서 터진 사건이다. 더 수사해 보아야 하겠지만 여긴 또 변호사, 회계사, 언론인, 공직자, 정치인 등 큰돈에 탐욕을 가진 알량한 검은머리 식자들의 떡고물 판이 된듯하여 아연실색하게 한다. 당시에 산속에서 누대를 살아오신 주민들이 무얼 제대로 알았겠는가.

 

그러나 대다수의 1930-1940년대 출생자로서 나라와 자기 삶에 헌신한 보통선배들의 힘든 노후인생과 건강관리는 후배들이나 나라에서 더 극진히 보살폈으면 한다. 평생을 소수의 인생동료 특권층들의 이런 시대적 특혜사실(물론 당사자들의 개인적인 비리나 과오는 아니다)도 모른 채 오로지 매일 땀으로 눈물로 인내로 가족을 위해 일하며 삶에 순순히 순응하며 힘들게 늙어왔을 터이다. 당시는 언론도 재갈을 물린 시대이고, 지식인들은 절망하여 등을 돌리고 앉았고, 인권은 늘 산 너머에 있어 이분들을 보듬어 주지 못했다, 알고 보면 인생은 때를 잘못 만나면 더 서럽다.

 

(사족) 필자는 1985년 2월 국제그룹 회장의 비서로 신군부부터 그룹을 해체 당하는 통보현장에 같이 있었고, 1980년 5월 15-16일 양일에는 광주 금남로, 충장로에 머물며 마침 업무출장(계열사의 충금지하상가 건설관련 지원업무) 중에 있었기에 질서 있는 대학생 가두시위를 직접 눈앞에서 지켜본 사람이며, 이틀 뒤에 시작된 시민들의 무고한 무력희생이란 반역사적 참혹함으로 지금도 믿기지 않은 충격과 애도 속에 지내온 나름의 비화가 있어 그 소회도 이글에 담았다.

 

엄 길청(글로벌캐피탈리스트/글로벌경영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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